“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는 만질 수 있어서다”고 한 휴대폰 광고는 말한다. 그러나 정신분석학은 말한다. 당신은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다고. “성관계”가 있을 수 없는 남녀의 욕망구조 때문이다. 남성과 여성은 결코 서로의 결여를 채워줄 수 없다. 언제나 상대방이 완벽한 대상이길 바라지만, 결코 그럴 수가 없다. 그러나 이런 가설은 너무 원칙론이다. 이런 원칙의 문제를 떠나서,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다는 진술을 더 파고 들어가 보면, 훨씬 더 흥미로운 점을 발견할 수 있다. 이 말의 모순은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져볼 때 드러난다.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가 만질 수 있어서 그렇다는데, 그렇다면 전지현이 없는 경우는 어떨까?
놀라운 진실이 모습을 드러낸다. 전지현이 없다면, 여자 친구도 좋을 이유가 없다는 진실 말이다. 전지현은 좋지만, 만질 수가 없다. 여자 친구는 전지현보다 좋지 않지만 만질 수 있다. 그래서 이 발언의 화자는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를 더 좋다고 한다. 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지현이 없다고 가정한다면, 상황이 간단하지 않다는 사실이 드러난다. 전지현이 없으면, 여자 친구를 만지는 행위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전지현이 있기 때문에 만질 수 있는 여자 친구가 ‘더’ 좋은 것이다. 이런 아이러니한 상황이 말해주는 것이 무엇일까? 바로 욕망의 대자성이다. 욕망의 문제는 언제나 대자적이다. 전지현이라는 대자적 관계가 없다면, 여자 친구에 대한 나의 욕망도 없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욕망은 언제나 타자(Other)의 욕망이다. 여기에서 타자라는 것은 나의 의식이 통제할 수 없는 상징 질서이며 법이다. 이런 맥락에서 나의 욕망은 타자의 담론이다. 내가 전지현보다 여자 친구가 좋은 이유를 말할 때, 그건 내가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상징적 대타자, 다시 말해서 휴대폰을 사도록 광고하는 ‘자본주의’가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당신은 여자 친구도 만질 수가 없다. 당신이 만지고 싶은 건 여자 친구가 아니라 전지현이기 때문이다. 당신의 손길이 더듬는 살(flesh) 너머에 전지현은 있다. 가 닿을 수 없는 욕망의 대상으로 전지현이 있는 것이다. 당신의 여자 친구를 만지는 욕망은 이미 전지현이라는 불가능한 대상을 향한 것이다. 비록 당신이 여자 친구를 만지더라도, 당신은 전지현을 욕망하고 있다. 그리고 전지현이라는 기표가 은밀하게 가리고 있는 것은 자본주의의 쾌락이다. 오직 자본주의를 즐겁게 하기 위해 우리는 전지현을 욕망한다. 욕망의 법칙은 이런 것이다. 당신은 전지현도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기에 휴대폰을 사야한다. 법의 명령은 이것이다. 당신이 전지현 뿐만 아니라, 여자 친구도 만질 수 없다는 사실을 은폐하기 위한 간계가 바로 ‘신형’ 휴대폰이다. 자신의 욕망에 대한 알리바이를 만들어낼 때, 당신은 ‘언제나 이미’ 자본주의의 언어로 말하고 있는 것이다.